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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비 LIFE/매일 묵상

2025년 6월 13일 금요일 욥기 15장 묵상

by 하나비블로그_관리자 2025. 6. 22.

2025년 6월 13일 금요일 욥기 15장 묵상 

6 자네의 입이 자네를 정죄하지 내가 정죄하는 게 아니네. 자네 입술이 자네에게 불리하게 증언하는 거야.
7 자네가 첫 번째로 태어난 사람이며 자네가 산보다 먼저 만들어졌는가?
8 자네가 하나님의 비밀을 들었으며 자네만 지혜를 알고 있는가?
9 우리는 모르고 자네만 아는 게 무엇인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실을 자네만 깨달은 게 무엇인가?
10 우리 가운데는 백발의 노인들도, 나이가 많은 사람들도 있고 자네 아버지보다 훨씬 나이 많은 사람들도 있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주님! 무조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아멘 ! 

# 십자가 복음 = 공의와 사랑 / 절반만 있으면 복음이 아니다! 

로마서를 보면, 인간은 “가능성 제로” 라고 선포한다. 즉 인간은 구원 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은 윤리적인 모습으로! 
어떤 사람은 도덕적인 모습으로! 
어떤 사람은 노력하는 모습으로! 
어떤 사람은 처절하게 발버둥 치는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 
그런 모든 방법은 다 막혔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인이라는 그 본질적인 문제를 통해 절망 가운데 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빛과 같이 우리에게 답을 주는 유일한 대안이 나왔다. 절망에서 소망으로 갈 수 있는 전환점이 생겼다. 

그것이 바로 
우리 예수님! 오직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는 길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구원의 방법은 “십자가 복음“ 이다. 

십자가 복음이 기독교 핵심이다. 

하지만, 십자가 복음을 제대로 모르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럼 십자가 복음은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 ! 이 둘이 만나는 곳이 십자가이다. 

하나님의 공의가 무엇인가? 
선악을 공평하게 처리하시는 하나님 속성이다. 이때 죄의 삯은 사망이다. 즉 죄값을 치러야 한다. 

그래서 
모두 죄값을 치러야하기에 죽는 것이다. 이것이 공의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에 대한 처절한 결과가 십자가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십자가의 절반! 

그럼 나머지 절반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사랑이다. 

내 죄때문에 나 대신 예수님께서 죄의 값을 치르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가장 큰 사랑이다. 내가 달려야 할 십자가에 예수님이 달렸으니 말이다. 

이 둘이 합쳐져서 십자가 복음이 완성되는 것이다. 십자가를 통해 ‘공의’를 인식하는 것과 ‘사랑’을 느끼는 것! 

십자가에 집중한다는 것은 
이런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누리는 것이다. 이 둘 중에 하나라도 빠지면 그것은 온전한 복음이 아니다. 

오늘 본문 
욥기 15장을 묵상하면서! 욥의 친구 엘리바스의 충고! (나는 비난에 가깝다고 생각함 )는 거의 틀린말이 아니라 맞다. 그런데 이 충고에는 공의는 있지만 사랑은 없다. 

[욥15:12-17, 우리말성경]
12 어찌하여 자네가 이토록 흥분해 눈을 치켜뜨고
13 영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입으로 그런 말들을 쏟아 내는가?
14 사람이 무엇이라고 깨끗할 수 있겠나? 여자가 낳은 자가 무엇이라고 의로울 수 있겠는가?
15 이보게. 그분은 그분의 거룩한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으신다네. 진정 그분 보시기에는 하늘도 깨끗하지 않다네.
16 그런데 하물며 죄악을 물 마시듯 들이키는 추악하고 부패한 사람이야 오죽하겠는가!
17 내 말을 들어 보게. 내가 설명해 주겠네. 내가 본 것을 말해 주지.

오늘 본문에는 
욥의 친구 엘리바스의 두번째 충고가 나온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정죄하고 책망하고 지식으로만 전달하는 말을 한다. 

성경에서 보면 욥기만큼 논리적이고 합당한 말이 나오는 부분은 없다고 생각한다. 정답이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게 그렇게도 쉬운가? 
고난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에게 그 옆에서 침묵하고 울어주고, 같이 기도해주는게 답이다. 

섣불리 신앙적인 말 몇 마디로 충고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피상적으로 살고, 
사변적으로 사는 이유는 그 안에 회개와 안타까움과 눈물이 없기 때문이다. 통한의 눈물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엘리바스에게는 지금 없는 것은 눈물.. 공의와 따끔한 충고는 있는데 .. 같이 아파하는 마음은 없다. 

뭐가 그리 잘났는가? 
뭐가 그리 떳떳한가? 

십자가의 절반만 가지고는 온전한 복음이 될 수 없다. 공의 그리고 사랑! 이 둘이 온전히 합쳐져야 비로소 복음이 완성되는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 사랑은 “값없는 은혜” 라고 한다. ’값없다‘ 는 값을 매길 수 없다는 것이지.. 값이 싸다는 뜻이 아니다. 


공의도 귀하고 사랑도 귀하다 이 둘이 함께 있어야 한다. 
교회는 공의가 필요하지만, 
서로를 향한 안타까움과 아픔도 필요하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 안에 주시길 소망하고 간구합니다. 아멘 !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찬양합니다! 
할렐루야!